어느 카페에서 ‘시내버스만 타고 서울-부산 왕복기’를 봤다.
글 쓴 분은 왕복에 각각 하루씩 이틀동안 이걸 하셨다는데... 왠지 지리산 화엄사-대원사 코스를 스틱 없이 1박2일로 완주했다는 얘기처럼 들려서 쫌 무서웠다--;
글 말미에 주의사항을 알려주셨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음에 탈 버스의 시간표를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 콕 박혀서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그날 낮에만 해도 나는 깐느의 해변에서 햇빛과 그늘을 왔다갔다하며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있었다.
연주가 끝나면 이제 기차역으로 가서 스위스행 야간열차를 예약하고 밥을 먹고 좀 더 구경하다 밤이 되면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스위스 루체른으로 갈 '예정'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미리 가서 기차시간을 확인하자고 일어난 시간이 대략 5시 30분. (쩜 소심하기때문에 '미리미리'이런거를 좋아한다.) 그르나, 기차역에서 질문을 받은 차장은 고개를 저으며 시간표를 가리켰다. 이런 국제적인 도시에서 5시도 안돼 막차가 끊기다니! 당황 할 수밖에 없는 것이-아 네, 그러시군요. 그럼 까짓거 하루 손해보는 셈 치고 토플리스 할머니들이나 더 구경을 할…수가 없는 상황이었거든.
그때 깐느는 영화제 기간이었고 그게 내가 거기 간 이유였다. 영화제에 참여는 못해도 공기라도 마셔 보려고...
영화제 기간에 깐느에서 숙박을...예약도 없이? 흐어~
꼼짝 없이 노숙을 하게 된 나는 머리를 굴렸다. 여기는 없어도 파리에 가면 있을거야, 설마 있겠지...
없었다.
파리행 기차안에서 시간표를 뒤지고 캐리어를 끌며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센강을 건너 리옹역과 오스테를리츠 사이를 터덜거리며 다니는게 위험하거나 말거나, 제발…. 그러나 없었다.
그리하여 숙소도 없이 기차가 끊긴 시간에 리옹(아니면 오스테를리츠)역에 노숙자 몇명과 남겨진 거였다.
캐리어는 두개였는데, 한개는 내것이었고 다른것은 아마 그 안에 든것이 전 재산일 것처럼 보이는 노숙자 언니의 것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마리와 나 말고도 남대문에서 물건 떼어가는 아줌마처럼 커다란, 그야말로 '보따리'를 든 예쁜 언니가 있었는데 아까부터 아랍계 남자 하나가 그녀를 따라다니며 추근대는게 눈에 거슬리는거였다.
내가 또 소심하긴 해도 오지랖이 백리를 커버하는데다 현재 상황에 화가 나서 드디어 내가 감당 못할 지경이 되자 소심녀답게 폭발해 버려서 그 남자에게 ‘너 잘걸렸다’ 상황이 돼서 따지기 시작 한거다.
"싫다잖아. 싫다면 싫은 줄 알 것이지 대체 왜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거야. 그 언니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그럼 나랑 한 번 붙어 볼테냐?! 대한민국 소심녀가 화나면 하늘 땅이 뒤집어진다는 걸 보여주마!!!"
대략 이런 말을 그 남자에게 떠들었던거 같다. 한국말로, 그것도 존댓말로... 아아 대한민국 소심녀의 예의바름이여...
지가 남잔데 진짜 멱살잡이 일어났으면 이겼겠지. 하지만 외계의 것 같은 언어로 따지고 드는 쬐깐한 동양 여자애 때문에 남자는 당황해서 주춤거렸다. 조용한 대합실에서 이렇게 큰 소리로 알아듣지도 못하게 떠드는 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벙- 한 얼굴이 됐다. 사실은 나도 어색해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소심한 나 답게 바로 후회 한거다. 저 언니가 밀고 당기기 하는 중이었으면 이 무슨 쪽이란 말이냐...
그 어색한 상황이 10분쯤 지난 후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닮은 역원 한명이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나야 뭐 아는 말이 실 부 쁠레와 익스큐제므와, 나머지는 론리플래닛에 실린 영어 발음을 조합해 의사 소통을 하고 다녔으니 알게 뭔가. 다만 다들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일어나길래 시간 됐으니 역에서 나가라는 소리인줄 알았다. 그러나 이 한밤중에 대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때 내 소매를 잡아 끈 사람이 마리였다.
< 마리, 오겡끼 데스까? >
그녀는 내게 지붕이 있는곳을 안다며 다른 사람들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곳은 버스정류장이었다(과연 지붕은 있었다는...). 12시부터 루체른행 기차를 탈 때까지 대략 7시간동안 밤공기에 덜덜 떨면서, 우리는 얘기를 했다.
너무 추워, 캐리어에서 수건을 있는대로 꺼내 서로 목에 두르고 무릎에 덮고 밤을 새며 얘기를 했다.
그때 마리와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는지 지나고 나니 신기할 따름이다. 마리가 그 큰 눈을 땡글거리며 웃을때는 책에서 본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바로 저거구나 싶었다.
그녀는 오늘 딸을 보고 온 참이라고, 자주 보지 못해 슬프다고, 그렇지만 이렇게 지내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왜 보고싶은 딸을 자주 보지 못할까. 단어가 딸리기도 하지만 물어보면 안될듯해 그냥 묻어 두었다.
날이 밝고 사람들이 지나다니자 그녀는 가야 한다며 일어나서 나를 한 번 꼭 안아주고 갈 길을 갔다.
그 여행에서 내 목적은 런던에 가서 뮤지컬 보기였다. 하지만 좋은 추억은 프랑스에서 사람들과 만나면서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들은 오히려 더 뚜렸해진다.
다음에 모르는 데를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싶다.